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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茶飯事/내가 읽는 책

11월 그리고 17일 유혹하는 글쓰기

by 와이낫어스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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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를 완성할 때까지 참아라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제 작품을
수정하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수정 작업은 얼마나 많이 해야 하고 또 몇
번이나 해야 할까? 내 경우에는 언제나 수정
작업이 한번, 그리고 다듬는 과정이 한 번이었다
(다만 워드프로세싱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다듬는 과정도 두 번째 수정
작업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다만 워드프로세싱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다듬는 과정도 두 번째
수정 작업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여러분은 여기서 내가 개인적인 글쓰기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는 작가마다 작품을 고쳐 쓰는 방식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커트
보네거트는 각각의 페이지마다 정확히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될 때까지 다시 쓰곤 했다. 그
래서 완성본으로 겨우 한두 페이지만 쓰고 끝나는
날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원고가 완성되면
그것으로 작품도 완성이었다. 곧바로 출판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적용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미 한동안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정해진 방식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원고를 적어도
두 번은 써야 한다. 한 번은 서재문을 닫고 써야
하고, 또 한 번은 문을 열어놓고 써야 한다.

문을 닫아걸고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곧장
지면으로 옮겨 놓을 때 나는 최대한 빨리
쓰면서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 특히 장편 소설을 쓴다는 것은 외롭고
힘겨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욕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일과 비슷하다.
이때 자신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글을 빨리 써 내려가면 - 즉 필요에 따라 이따금씩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배경 스토리 따위를 다시
확인하는 일 말고는 줄곧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 적고 있노라면-처음에 품었던
의욕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다.

이 초고-스토리만 있는 원고-는 누구의 도움도
(또는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 써야 한다.
간혹 집필 중인 원고를 가까운 친구에게
(흔히 한 침대를 쓰는 친구가 제일 먼저
떠오르게 마련이다) 보여주고 싶을 때도 있을
텐데,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자랑스럽거나 혹은 미심쩍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충동을 억누르라고 충고하겠다.
긴박감을 계속 유지하라. 자기 작품을 '바깥세상'
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듣게
되면-불신의 말이든 칭찬이든 호의적인 질문이든
간에-긴박감이 줄어든다. 아무리 힘들어도 성공에
대한 희망을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채 계속 나아가라. 작품을 끝마치고 나면 자랑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웬만하면 초고를
완성한 뒤에도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방금 눈이
내린 들판처럼 작품 속에 오직 자신의 발자국만
찍혀 있을 때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p257~258까지의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퇴근하는 길 전화가 울렸다



어젯밤 갑자기 외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지 전화를 못 받아서 다시 걸었다.
갑자기 하는 말이 사촌 누나가 죽었단다.
하.. 할머니 돌아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부고 소식을 듣다니 . 가슴이 철렁했다.
이모의 딸인데 나도 어릴때 보고 성인이 된 후엔
만나질 못했다. 내가 알기론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랑 매우 가까운 곳의
선생님이었다. 어찌 보면 지나가다 마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계동에 있는 백병원으로
외삼촌과 어머니를 모시고 달렸다. 그나마
퇴근 이후라서 차는 안 막혀 도착할 수 있었다.
사촌 누나는 심근경색으로 죽었다고 한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도 혈압이
매우 높았다고 했다. 꽤 오랜만에 어머니는
이모를 만나 부둥켜안고 울었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먼저 보냈으니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는가. 이모는 나를 보면서 너무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과 이런 상황에
찾아와 준 고마움, 그리고 슬픔이 교차한
눈빛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너무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실 나는 달리 위로해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촌누나의 동생도 있었다.
둘째 누나였다. 둘째 누나도 너무 오랜만에
봤다. 날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직 준비가 전혀 되질 않아 손님맞이도
둘째 누나의 남편이 자리에 있었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며칠 전 내가 경험이
있어서 두 팔 걷고 나섰다. 이미 와 계신 손님
자리에 음식을 날랐다. 그래도 시간 내서
찾아와 주신 분들이니깐 정성스럽게 맞이했다.
이미 와 있던 손님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는 삼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도 삼촌들을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날 일이 없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결국 찾아와 주는 건
친지 가족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만 둘이
있던 집안이라 상주하실 분이 없었다. 대신
삼촌에 상주를 대신하고 있었다.



 

요즘은 형제가 적다



할머니는 자식이 많아서 손주인 나도 있었기에
상주할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자식이
하나 아니면 둘이기 때문에 상주를 해 줄 자식이
별로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는 변했다.
나의 부모님 세대는 형제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하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식을 적게 낳았다.
많아야 셋이니깐.
그래서 더욱 빈소가 초라해 보였다. 아쉽지만
어머니도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는 어머니와 삼촌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나도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창문을 보고 있으면 산이
보인다. 가만히 산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한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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