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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茶飯事/내가 읽는 책

10월 그리고 26일

by 와이낫어스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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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은 없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나는 독서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대게 일년에
70~80권쯤 읽는다. 주로 소설이다. 그러나
공부를 위해 읽는 게 아니라 독서가 좋아서
읽는 것이다. 나는 밤마다 내 파란 의자에 기대
앉아 책을 읽는다. 소설을 읽는 것도 소설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배움의
과정은 계속된다. 여러분이 선택한 모든 책에는
반드시 가르침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종종 좋은
책보다 나쁜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초등학교 8학년 때 나는 머리 렌스터의 어느
보급판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별 볼일 없는
과학 소설가였던 그는 주로 <어메이징 스토리스>
같은 잡지사에서 턱없이 적은 원고료를 주던
1940, 50년대에 대부분의 작품을 썼던 사람이다.
나는 렌스터의 다른 책도 읽어보았으므로 그의
작품이 들쭉날쭉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날
읽은 책은 소행성대에서 광석을 캐는 이야기였는데,
이 책도 별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었다. 아니,
그 말은 너무 잘봐준것이다. 사실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인물 묘사는 종잇장처럼 얄팍했고
플롯도 터무니없었다. 그중에서도
(당시 내가 느끼기에) 최악이었던 것은 렌스터가
'열띤(zestful)'이라는 말을 몹시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광석이 있는 소행성이
가까워지면 등장 인물들은 '열띤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채굴선에서 식탁에 앉을 때도
'열띤 기대감'을 품었다. 끝부분에서 주인공은
가슴이 커다란 금발의 여주인공을 끌어안고
'열띤 포옹'을 나누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문학적인 천연두 예방 주사와 같았다. 내 기억에
나는 지금껏 장편에서든 단편에서든 '열띤'이라는
말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형편없는 너



<소행성의 광부들>(정확한 제목은 아니지만 대충
비슷하다)은 독자로서의 내 삶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순결이나 동정을 잃은
순간을 기억하듯이 대부분의 작가는 어떤 책을
내려놓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아니,
지금도 이것보다는 훨씬 낫지!' 한창 노력중인
풋내기 작가에게, 자기 작품이 실제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보다 훨씬 낫다고 느끼는
것만큼 큰 용기를 주는 일이 또 있을까?

형편없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쓰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운다. <소행성의 광부들>
같은 (또는 <인형의 계곡>이나 <다락방의 꽃들>
이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소설 한 권은
유수한 대학의 문예 창작과에서 한 학기를
공부하는 것과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설령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초빙 강사로 나오더라도
마찬가지다.

한편, 좋은 책은 한창 배움의 길을 걷는
작가들에게 문체와 우아한 서술과 짜임새 있는
플롯을 가르쳐 주며, 언제나 생생한 등장
인물들을 창조하고 진실만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가령<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은 신진 작가들에게
좌절감과 더불어 저 유서 깊은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나 같으면 천년을 살아도
이렇게 좋은 작품을 못 쓸 거야'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더 높은 목표를
갖게 만드는 채찍질이 될 수도 있다. 빼어난
스토리와 빼어난 문장력에 매료되는 것은 ㅡ
아니,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은 ㅡ 모든 작가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이다.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되지 못한 작가는 자기 글로 남들을
매료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p176~178
발췌하였습니다.

하루 마감



나는 글쓰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달라지려고
쓰는 것이다. 인생이 바뀌는 시점이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내가 지하 100층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지하에 있다. 어릴 때는
활발하지 못했다. 소극적이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거 못했다. 나랑 정 반대인 사람은
부러웠다. 청소년기가 되었을때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외모적으로 성장했을때 주변에서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겼다. 그 자신감은 영원히 갈 줄 알았다.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첫번째 실패를 경험했을때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떨어지니 피하고 싶었다.
피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잠깐 위로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까지
짧은 인생 살았지만 기분이 좋다. 가끔 생각한다.
좋았던 기억을 꺼내어 생각해본다.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떨어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였다. 힘들었다.
내려가는 기분도 나를 힘들게 했다. 열심히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얼마나 올라
갈수 있다고 이렇게 사는지 가끔 생각한다.
주변을 돌아본다. 지금 내 나이가 되면 잘되서
자리를 잡은 사람도 보인다. 진짜 잘 된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노력을 많이 해서 얻은 거
보면 잘 된건 맞는것 같다. 그런 사람들 보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무엇을 도전해도 다 할수 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꼭 해내었다.
긍정적으로 항상 말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과정은 못봤으니 모르겠다. 그래도
결과를 보여주었다. 꼭 이루었다. 나는 아직 그
부류에 속하지 못했다. 속하고 싶어 생각은
많이 했다. 그런데 노력을 많이 안했다.
난 끈기가 부족했다. 지금 끈기를 늘리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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